부처님의 법은 지혜와 자비의 두 방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둘은 다르지 않다. 지혜로운 사람이 자비롭지 않을 수 없고 자비로운 사람이 지혜롭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은 불교의 방편이자 궁극이다.
따라서 중생의 희로애락과 공감하지 못하는 지혜는 그것이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다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오늘은 어떠셨나요?”라고 묻는 광명스님은 동두천 마차산이 바라보이는 솔향기 그윽한 작은 절 무심정사에 살고 있다. 작은 절임에도 젊은 신도들이 많은 이유는, 굳이 불법이 아니더라도 자기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광명스님 때문이다.
무심정사에는 봄이면 꽃 피고 새 울고 여름 녹음과 가을 단풍과 겨울 눈 내리는 마차산 사계절 풍경이 잘 보이는 창 넓은 미소방微笑房이 있다. 미소방으로 많은 이들이 스님을 찾아온다. 부부갈등이나 자녀문제, 사업문제 등등을 스님이 내준 따듯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스님의 따듯한 마음에 위로를 받고 힘을 얻어 무심정사를 내려간다.
쌀 한 톨에 일곱 근의 무거움이 있다고 경책한 옛 어른들의 “밥값해라!”라는 말은 스님이 자신의 삶과 수행의 철칙으로 삼는 글귀이다. 닭벼슬보다 못하다는 중 권력에 사로잡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작금의 행태에 스님의 마음과 행동과 글은 작은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런데, 깨달음을 자신의 문제,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하여 주변의 아픔과 고통에 눈을 감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중생들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바로 보지 못하고 외면하는 것은 불교 본연의 모습이 아니다. 어불성설이다.
인공지능이니 4차 산업혁명이니 하는 복잡한 세상에서 사람만이 희망인 것은, 사랑과 자비심이 인간이 발현한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큰’스님을 외치고 추앙하는 세태에서, 스스로 못났다고 부족하다고 낮추고 낮추며 다시 발심하고 중생과 함께하는 스님의 모습은 출가자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