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世靖, 1743~1818
본관은 진주, 자는 명초(明初), 호가 송담(松潭)이다. 아들은 홍낙안·이기경과 함께 공서파 3인방의 한 사람이었던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이다. 서학을 믿은 이가환·황사영 집안과 혼맥이 있었다. 41세 때인 1783년 늦깎이로 증광시에 응시해 진사 2등 6위로 급제했다. 이후 미관말직을 전전하다가 57세 되던 1799년에야 회덕현감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추향(秋享) 제례 때 축문에 명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 일로 1803년 12월에 경상도 기장현으로 유배 갔다가 이듬해 사면되었는데, 이후 벼슬에 뜻을 잃고 각지를 유람 다니며 만년을 보냈다.
강세정은 철저한 공서(攻西)의 입장에서 서학 집단의 신앙 활동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다만 신서파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던 채제공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았고, 가문의 희망이었던 아들 강준흠의 공서가 홍낙안·이기경 등 반反채제공 노선과는 달랐음을 해명하는 데 애를 썼다. 이는 1805년 정순왕후가 세상을 뜬 뒤 노론 벽파가 몰락하고 시파의 김조순 등이 집권하게 된 정국과 관련이 있다. 이때 채제공 계열의 남인이 복권하면서 강준흠이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었는데, 강세정은 《송담유록》을 통해 아들의 정치적 입장을 변호하고 가문을 보전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