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마다 당신들을 떠올리면서 빈 엽서를 꺼내놓았습니다.
조용히 제 하루를 돌아보고 짧은 편지를 썼지요.
그 많은 당신들 앞에 드리는 짧은 편지는 어쩔 수 없이 제 감정의 기복을 따라 얼룩지곤 했습니다.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 흘러가버린 감정의 무늬들―부쳐버린 엽서들, 걱정스럽습니다.
당신 앞에 도착한 엽서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했을까? 짐작하기 어려워서지요.
세상은 날이 갈수록 강팔라지고, 마음도 몸도 고요한 순간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의 거친 흐름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 안에서 괜찮으신지요?
당신이 보내올 답장을 많이 기다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대화가 그리운 세상을 살고 있기는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주고받는 대화를 이야기 나눈다고 합니다. 주는 것이 주는 것만 아니고, 받는 것이 받는 것만 아니라는 데서 말의 깊은 뜻을 찾고 싶었습니다.
엽서가 바로 그것이기를!
-'엽서를 띄우며' 중에서
<저녁마다 당신들을 떠올리며 빈 엽서를 꺼내놓았습니다>
조용히 제 하루를 돌아보고 짧은 편지를 썼지요. 날이 갈수록 엽서를 받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많은 당신들 앞에 드리는 짧은 편지는 어쩔 수 없이 제 감정의 기복을 따라 얼룩지곤 했습니다. 다 기억하지 못하는 흘러가버린 감정의 무늬들―부쳐버린 엽서들, 걱정스럽습니다. 당신 앞에 도착한 엽서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했을까? 짐작하기 어려워서지요.
-‘엽서를 띄우며’ 중에서
판화는 여백을 그리는 작업이라고 한다. 빈 엽서라고 하지만 여백의 그림 위에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를 띄운다. 때로는 그날을 보내면서 편지 글과 함께 남기고 싶은 이미지를 드로잉하기도 한다. 매일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지 5년이다. 『자고 깨어나면 늘 아침』은 그렇게 보낸 편지를 모아 엮은 세 번째 책이다.
이철수가 충북 제천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은 지도 올해로 20년이 되었다. 하늘의 행(行)을 따라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손으로 자박자박 써내려간 일상의 장면들은 우리가 살고 느끼면서도 특별히 이야깃거리로 삼지 않는 작고 소중한 풍경이 대부분이다. 그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글로 채워진 공간에서 넓어지는 사유의 여백이 느껴진다.
<마음공부에 지름길이 어디 있나요?>
자고 깨어나면 청하지 않은 해님이 손님으로 찾아오고, 그렇게 시작된 평범한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한 욕심으로 지금 느낄 수 있는 소중한 마음을 잃는다면 인생의 대부분을 잃는 것이다. 이철수는 주변에 보이는 평범한 사물, 사소한 습관이나 현상도 꼼꼼히 관찰하고 생각하여 마음공부의 자습서로 삼는다.
겨울을 맞아 추레해진 가을꽃이 보기 싫다고 뽑아버린 날은 정갈함을 고집하느라 꽃이 자연스레 소멸하도록 내버려 두지 못한 자신의 성정을 탓하며 그 마음으로 주변에 끼친 상처가 적잖음을 되새기고, 건강하면 들어오지 않았을 감기가 들어오고서는 쉽사리 나가지 않음을 보며 마음의 병도 그러하리라 짐작한다.
이 계절은 차가운 음료도 마땅찮고 뜨거운 차도 끌리지 않습니다. 맑고 시원한 물 한 잔! 그게 오히려 낫습니다. 몸도 마음도, 잡된 향기, 색깔, 자극 따위 놓아 버리고 그저 조용하고 맑아지면 계절과 조화를 이루는 셈이 될 듯합니다. 자연에서 길어 올린 찬물 한 그릇처럼!
마음공부에 첩경이 있다는 투의 유혹이 간간이 보입니다. 마음공부에 지름길이 어디 있나요? 과외 수업, 족집게 과외 따위 있을 턱이 없습니다. 자고, 먹고, 입고 하는 일하느라 숨이 가쁘고 마음 허덕이게 되는 나 자신이 가련해 보이면 거기서 시작이지요. 내 문제라 남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가을로 접어드는 길에―나 어디로 가고 있나?
-〈가을〉, 220-221.pp
<몹쓸 세상, 그래도 아름답다 하자>
그에게는 이웃도 많다. 무심코 지나치면 이웃으로 삼을 수 없는 작은 사물이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지나가는 그를 보고 황급히 도망치는 오리, 짧은 외출에도 마중을 나오는 추녀 밑 풍경 소리, 뜰에 놓인 바위, 콩밭 골에 어렵사리 꽃피워낸 봉숭아 한 포기, 콩나물밥을 좋아하시는 스님, 운동화 한 켤레 값이 무서워서 고민하는 수녀님, 자존심을 걸고 기어이 만 원을 깎아주려는 세탁소 아저씨……. 이처럼 그의 생활 가까이에 만나지고 만져지는 이웃들과는 작은 정을 주고받는 기쁨을 누리고 그 행복을 편지로 전해준다.
그러나 이웃들을 만나는 일이 늘 기쁜 것만은 아니다. 고된 노동으로 하루를 사는 농부들의 가슴에 망치질을 하는 농업 정책, 다래나무의 눈물방울 같은 수액을 뽑아가는 사람들의 탐욕, 허공을 떠다니는 집값을 대한 날은 편지를 통해 안타깝고 아픈 마음을 토로하기도 한다. 또 한 발짝 떨어져 있으나 못내 잊고 살수는 없는 춥고 가난한 이웃들을 아리게 떠올리며 곱하기는 잘 하지만 나누기에는 서툰 세상에 힘겨워하고 때로는 부끄러워한다.
조용히 마음 살피면 아름다운 세상이 보인다.
그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이 세상은 갈수록 힘겹다.
이긴 사람도 힘겹고, 진 사람도 어렵다.
―참 몹쓸 세상이다. 그래도 애써 아름답다 하자.
-〈봄〉, 84-85.pp
<당신이 보내올 답장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보내올 답장을 많이 기다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대화가 그리운 세상을 살고 있기는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주고받는 대화를 이야기 나눈다고 합니다. 주는 것이 주는 것만 아니고, 받는 것이 받는 것만 아니라는 데서 말의 깊은 뜻을 찾고 싶었습니다.
엽서가 바로 그것이기를!
-‘엽서를 띄우며’ 중에서
손은 묵묵히 일할 따름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눔은 손을 깨끗이 하는 일이다. 두 손 가득 움켜 내게로 당겨오지 않고 들어 이웃에게 펼치면 넉넉한 나눔의 손길이 되고, 나눔의 예배가 된다. 나눌 수 있는 것은 물질만이 아니리라. 엽서를 통해 주고받는 마음도 나눔의 한 모습이고, 그렇게 나눔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축복이 될 것이다.
매일 일기를 쓰듯 꾹꾹 눌러쓴 편지를 모아 부친 정성에 답장을 보내고 싶다면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 한 자락에 그가 매일 저녁 말해준 이야기들을 보관할 작은 공간을 마련해두는 것도 방법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