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인도,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잠재력을 품고 태어난다. 그가 세상에 발을 내딛기 전에는 그의 진면목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위대한 발견이며 거기엔 아름다움이 깃들어져 있다. 거기에 바로 존재와 사물의 차이점이 있다.
사물은 잠재력이 없다. 그것은 사물 자체로 끝이다. 책상은 책상이고 의자는 의자이다. 의자가 다른 게 되지는 않는다. 거기엔 아무런 잠재력이 없으며 오직 사물로서의 실체성만 갖는다. 그것은 다른 뭔가로 변형될 씨앗이 되지 못한다.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 그로 인해서 여러 고난과 기쁨, 온갖 도전과 난관이 생긴다. 어린아이는 텅 빈 백지상태로 태어난다. 어떤 사람이 될지 아무런 표시나 안내 없이 모든 차원이 열린 채로 태어난다. 가장 먼저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어린아이는 사물이 아니며 하나의 존재이다. 아이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앞으로 그렇게 될 존재이다. 아이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가 어떻게 삶을 마감하게 될지, 그가 살면서 얻게 될 경험, 번뇌, 근심, 황홀경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론으로 드러날지, 삶이 종국에는 결국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를 예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평생을 모두 합한 총량을 처음부터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는 태어나면서 출생도를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니다. 모든 점성학자와 사주쟁이들이 그대에게 거짓을 말해왔다. 그대를 속일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그대는 그들에게 속임을 당한다. 부모들은 아이가 어떤 존재가 될지에 관심을 쏟는다. 그러한 관심은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온갖 사기꾼들에게 이용당하기 마련이다.
그런 사기꾼들은 이렇게 예언하곤 한다.
“그 아이는 이런 사람이 될 겁니다. 이 아이는 저런 사람이 될 겁니다.”
그런 자들이 큰 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저 약간의 이익만 취할 뿐이다. 그들의 예언은 절대로 들어맞지 않는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성직자, 정치인, 교육자들 때문에 생긴다. 정치인은 아이가 지닌 진정한 잠재력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과정의 일부분으로서 아이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그는 모든 아이에게 투자한다. 모든 아이는 잠재적인 아군이거나 혹은 적군이기 때문이다. 최대한 어렸을 때 아이에게 그림을 그려 넣는 게 좋다.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성장을 시작하기 전에 아이의 내면에 있는 씨앗을 죽여 버리고 정치인의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여정으로 아이를 끌고 들어간다. 성직자 역시 아이를 투자의 대상으로 관심을 둔다. 교황은 세상에 더 많은 가톨릭 신자를 가질 때 더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다. 가톨릭이 사라진다면, 과연 교황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과연 누가 그를 신경이나 쓰겠는가? 새로 태어나는 모든 어린아이는 정치인, 성직자, 교육자들에게 이용당할 만한 잠재력을 갖고 태어난다.
그 아이는 조만간 성인이 되어 세계의 시민이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그를 붙잡아야 한다. 가톨릭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가톨릭 신자가 되어야 한다. 다행히도 고아가 된 아이는 테레사 수녀와 같은 사람들이 돌봐주면서 가톨릭 신자로 개종해줄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행복하다. 세상에 고아가 많아질수록 테레사 수녀는 노벨 평화상을 더 많이 수상할 수 있다. 고아가 더 많을수록 가톨릭 신자가 더 늘어난다.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을수록 그들은 더 쉽게 가톨릭 신자로 개종된다.
예수는 인간이 빵만 먹고는 못 산다고 말한다. 진정한 인간에게는 그 말이 옳지만, 군중에게는 맞지 않다. 군중에 관한 한, 나는 인간이 빵만 먹고 살아간다고 말하는 바이다. 그리고 오직 군중만 존재한다. 과연 진정한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이런 정치인, 성직자, 교육자들은 그 누구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진정한 존재로 남아서 자신의 진면목을 얻고 자신을 발견하도록 내버려둘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딜 가나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상태이기 때문에 모두가 그 아이에게 뭔가를 써넣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낀다. 물론 부모도 자신의 종교, 계급, 철학, 정치를 아이에게 써넣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는 부모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유산을 짊어져야만 한다. 부모세대가 수세기 동안 힌두교로 살아왔다면, 그 아이 역시 힌두교도가 되어서 힌두교의 유산을 다시 미래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부모들은 아이 자신의 잠재력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사실 아무도 그것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신이 투자한 것에만 관심을 둔다. 물론 모두가 투자를 하고 있다. 부모는 아이에게 많은 것을 투자한다. 아이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교육을 시켜준다. 모든 것이 조건부이다. 그것을 말로 했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