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송자(茶松子). ‘차를 즐기는 송광사 스님’이라는 뜻이다. 조계산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위대한 선지식을 가장 많이 배출한 승보사찰이다. 한반도의 험난한 역사 속에서 송광사 역시 폐허가 될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한 혼란기에 송광사는 물론 조계종의 종통을 혼신을 다해 지킨 분이 바로 다송자(茶松子) 금명보정(錦溟寶鼎, 1861~1930) 선사이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참담한 시절인연 탓에 다송자 금명보정이라는 이름은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의 후손들이 그 시대를 조망하고 기록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자칫 영영 잊힐 수도 있는 이름이었다.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현봉 스님은 사라질 뻔한 송광사의 옛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금명보정 스님의 업적을 알게 되었다. 이 책 《다송자 금명보정》에서는 조계종의 종통을 지키며 송광사에 관한 모든 기록을 남기고, 한편으로는 수행자로서 여여하게 일생을 마친 금명보정 선사의 일대기를 밝힌다.
저자소개 저자 : 현봉
경남 사천 생. 1974년 승보종찰 송광사에서 구산(九山)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5년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을 전계사로 비구계를 수지. 수선사, 백련사, 해인사, 통도사 극락암, 봉암사, 월명암, 수도암, 정혜사, 칠불사, 상원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 조계총림 유나, 조계종 중앙종회의원과 법규위원, 정광학원 이사, 송광사 주지와 조계종 재심호계위원 등 역임. 송광사 주지 재임 때에는 조계종 교구본사 중 최초로 종무행정 전산화, 재정의 공개 투명화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역서로 『선에서 본 반야심경』(개정판 2008, 불광출판사)이 있다. 지금은 송광사 광원암에서 진각국사 원조탑(圓照塔)을 모시고 농사일을 하며 정진하고 있다.
목차
서(序) 『다송시고(茶松詩稿)』의 첫 시를 읽으며
제1장 금명보정의 생애
1 | 행장行狀 1) 출생 및 소년기(1~14세) 2) 출가 수학 시기(15~29세) 3) 도제양성 및 수선修禪 시기(30대) 4) 송광사 외호外護 시기(40대) 5) 교화 시기(50대) 6) 저술 시기(60대) 7) 회향回向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시대 그리고 일제강점기는 전통과 정체성이 혼란스럽던 격동과 혼돈의 시대였다. 그러니 산중이라 하여 예외일 수 있겠는가? 해동불교의 위대한 선지식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조계산 송광사에서 그런 시대를 꿋꿋이 살면서 무너져가는 역사를 다잡으신 분이 있었으니, 바로 다송자茶松子 금명보정錦溟寶鼎(1861~1930)선사이다. 금명 스님은 세상에 크게 이름나지 않았지만,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그 격동과 혼란의 시절에 폐허가 되어가다시피 하는 송광사에서 도제양성과 도량 외호를 하며 혼신을 다해 묵묵히 이 도량을 지켜온 분이다. 그 혼돈의 시대에 자칫하면 사라질 뻔했던 송광사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을 한평생 동안을 수집하고 고증하며 정리하였다. _29쪽
현재 다송자의 저술은 『한국불교전서 제12책』 「보유편」에 방대한 분량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글 세대가 모르는 한문인데다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아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쉽지 않다. 그래서 다송자의 문집 가운데 일부 행적을 뽑아 스님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우선 행장을 중심으로 그분의 업적을 정리해보았다. 그리고 다송자의 시고詩稿 1,000여 편 가운데 차시茶詩 70여 편과 문고文藁 가운데 기문記文 몇 편을 골라 미력하나마 이를 번역하여 함께 실었다. _30쪽
금명은 자호自號를 다송자茶松子라고 하였으며, 그의 문집 가운데는 약 1,000여 편의 시를 지어 엮은 『다송시고茶松詩稿』를 남겼는데, 위의 시는 그 『다송시고』의 제일 첫머리에 실려 있다. 그래서 이 시를 들머리 삼아 다송자 금명보정선사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_36쪽
금명의 위대한 업적에 비해 송광사 대중이나 일반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편이라서, 2001년 10월 14일, 송광사에서 대덕 석학들을 모시고 〈다송자 금명보정의 생애와 사상〉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그분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조명한 일이 있다. 그 학술대회로 인하여 각계에서 다송자 금명 스님에 대한 연구가 일어나 고 논문들이 발표되면서 현창顯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분의 업적에 비하면 아직도 미흡한 상태라서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여 그분의 행장을 연대별로 정리하여 소개한다. 더불어 스님의 행장을 통해 그 시대에 송광사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크고 작은 사건의 흐름도 더듬어 보고자 한다. _39쪽
원당의 일로 그동안 세 번이나 상서上書를 쓰고 세 번이나 상경하니, 주위에서 말하기를 “불자佛子가 본업本業에 힘쓰지 않고, 서울에나 드나드는 것은 명리名利나 구하는 일이 아닌가?” 하자, 답하기를 “불자도 신자臣子이니 임금을 위하는 일이 본래 불법佛法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충군忠君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공경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 하였다. 이런 과정을 보면 당시 혼란스런 조선 말기 부패한 관리들의 적폐積弊와 난적亂賊들의 횡포 속에서 민멸泯滅해가는 송광사를 부지扶持하기 위해 노력하는 다송자의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일면을 엿보게 된다. _75~76쪽
4월 18일 밤에 대곡의 일본 헌병들과 순천에 주재駐在하던 순사巡査 안정安正의 군이 합세하여, 그날 저녁에 은적암을 찾아가서 발포하니 모두 도망가버렸다. 일병들은 분풀이로 암자의 귀중품들을 약탈하고, 그날 밤에 은적암과 그 아래의 보조암을 불태워버렸다. 금명은 이때의 참화를 상세히 적어 「은적암보조암회록기隱寂庵普照庵回祿記」로 남겨 두었다. _82쪽
어느 날 두 벗이 찾아와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면서 말하기를 “이런 난세에 보신하는 것은 재야에 숨는 것이 좋으니 함께 세속으로 나가도록 하자”고 하자, 대꾸하기를 “두 형들은 어찌 그런 생각을 하는가? 나는 이미 입산하여 불자佛子가 되었으니 맹세코 산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오. 차라리 저런 산적들에게 해를 당할지언정 불자의 이름을 바꾸지 않으리라. 그대들이나 바라는 대로 환속하여 스스로 도생하시기 바라오” 하면서 목숨을 다해 이 송광사 도량을 끝까지 지킬 것을 다짐했다. _83~84쪽
한국불교에서 승보종찰(僧寶宗刹)이라 하면 곧 송광사를 뜻한다. 16국사를 비롯해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수많은 위대한 선지식들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불자들에게는 ‘다송자(茶松子)’라는 호도 ‘금명보정(錦溟寶鼎)’이라는 법호도 낯설다. 그 이유는 한반도의 험난한 역사에 있다. 금명보정(錦溟寶鼎, 1861~1930). 송광사에 출가하여 주석했던 대종사(大宗師)이다. 선사의 속성은 김(金)씨, 이름은 첨화(添華)요, 법휘(法諱)는 보정(寶鼎)이며, 법호(法號)는 금명(錦溟)이다. 그리고 스스로 호를 다송자(茶松子)라고 하였다. 금명보정 스님이 송광사를 지키던 때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대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혼란과 핍박의 시대였다. 조정의 관리는 승려를 노비 부리듯 하였고, 사찰은 종종 약탈의 대상이었다. 언제 목숨을 잃어도 놀랍지 않은 시대였다. 금명보정 선사가 남긴 당시 기록에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두 벗이 찾아와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면서 말하기를 “이런 난세에 보신하는 것은 재야에 숨는 것이 좋으니 함께 세속으로 나가도록 하자”고 하자, 대꾸하기를 “두 형들은 어찌 그런 생각을 하는가? 나는 이미 입산하여 불자(佛子)가 되었으니 맹세코 산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오. 차라리 저런 산적들에게 해를 당할지언정 불자의 이름을 바꾸지 않으리라. 그대들이나 바라는 대로 환속하여 스스로 도생하시기 바라오.”]
당시 일제는 일본의 조동종을 한국불교에 들여와 원종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찰을 통제하려 했다. 뜻있는 선사들은 이러한 만행에 저항하며 임제종 종무원을 송광사에 설립하였다. 이후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려는 수많은 핍박 속에서도 금명보정 선사를 비롯한 선지식들은 임제종풍에 입각해 우리 불교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금명보정 선사 역시 시대에 꺾이지 않고 평생 동안 송광사를 지켜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칫 사라질 뻔한 송광사의 모든 자료들을 한평생 수집하고 고증하고 정리해냈다. 오늘의 송광사가 승보종찰로 명실상부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금명보정 선사가 그 틀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송광사의 역사를 남기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한국불교와 나아가 한국문화와 시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를 남긴 업적이다.
금명보정, 초의와 범해의 동국계맥(東國戒脈)과 다풍(茶風)을 잇다
동국의 칠불계맥은 대은으로부터 금담에게 전해지고, 다시 초의와 범해로 전해졌다. 범해는 다시 송광사의 금명과 율암, 통도사의 선곡, 해인사의 제산과 취은 등 여러 율사들에게 전해졌다. 서상수계로 되살린 동국계맥을 중흥시켜 오늘의 한국불교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금명보정 선사는 이러한 초의와 범해로 이어지는 계맥과 더불어 그들의 선, 교, 율을 이어받고 대변했으며 나아가 그들의 다풍(茶風)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범해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고, 초의의 『동다송』과 『다신전』 등을 읽으며 대흥사의 다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책 《다송자 금명보정》에서는 금명보정 선사의 차시 70여 편도 번역해 실었다. 자호를 다송자(茶松子)라 한 것에는 ‘차를 즐기는 송광사 스님’이라는 자긍심이 담겨 있다. 남겨진 시를 통해 우리는 금명보정 선사의 면모를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금명보정 선사를 통해역사를 바로 세우다
이 책 《다송자 금명보정》의 지은이 송광사 방장 현봉 스님은 주지 소임을 맡았던 2001년 송광사에서 〈다송자 금명보정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역사 속에 묻힌 금명보정 선사의 위대한 업적을 널리 알리고 이를 계기로 금명보정 선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고자 한 것이다. 현봉 스님은 2015년에 다시 한 번 송광사에서 〈다송자를 중심으로 한 선사상(禪思想)과 송광사 다풍(茶風)〉에 대한 학술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금명보정 스님의 업적과 행적에 대해 제대로 알리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여겨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현재 다송자의 저술은《한국불교전서 제12책》 〈보유편〉에 방대한 분량이 수록되어 있지만 한문인데다 한글로 번역되지 않아 일반인들의 접근이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책 《다송자 금명보정》에서는 다송자의 문집 가운데 일부 행적을 뽑아 행장을 중심으로 업적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송자의 시고(詩稿) 1,000여 편 가운데 차시(茶詩) 70여 편과 문고(文藁) 가운데 기문(記文) 몇 편을 골라 번역을 함께 실었다. 행장을 따라가다 보면 송광사에서 일어났던 역사적인 크고 작은 사건을 접하게 된다. 또한 한반도의 당시 시대상도 알 수 있어 귀중한 사료 역할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송광사성보박물관의 도움을 받아 남아 있는 사진 자료들도 이 책에 수록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2020년은 금명보정선사 입적 90주기였다. 이때 송광사 부도원(浮屠園)에 금명보정탑(錦溟寶鼎塔)을 건립했다. 현봉 스님은 이후로도 금명보정 선사에 관한 자료를 보정해 드디어 이 책 《다송자 금명보정》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 한반도의 위기론이 대두되는 현 시대에 금명보정 선사의 행장이 독자들에게 깨달음을 주리라 믿는다. 이 책이 계기가 되어 금명보정 선사의 업적을 앞으로 더더욱 발굴할 수 있다면 큰 의미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