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는,“「범망경梵網經」이라는 한문 경전의 일부분인 ‘「범망경」 하권의 보살계본’에 대한 연구 초록”이라는 뜻인데, 문체나 내용으로 보아 원효의 초기 저술로 보인다. 보살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 조목은 대승불교 출가 사문으로서 가장 먼저 익혀야 했으므로, 원효는 출가 이후 이른 시기부터 「범망경」의 ‘보살계본’을 연구하다가 사기私記 형식의 연구 초록을 작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의 저술이다 보니 다른 저술들에 비해 한문 문체나 내용의 짜임새 수준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이 문헌이 원효의 저술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어 왔으나 내용 전반이나 인용구문에 대한 이해, 문장 핵심의 명확한 전달을 위해 원효가 인용구문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 점이며 거기서 보이는 자신감과 역량은, 범망경보살계본사기가 원효의 저술이라는 논거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원효는 계율에 대한 초기 학습을 「범망경보살계본사기」로 정리하였고, 훗날 더욱 원숙해진 탐구 내용을 「보살계본지범요기」에 담았다. 원효의 계율 사상은 계율에 대한 본질적 규범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계율에 대한 비非본질적 실용주의 시선을 보여 준다.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는 이러한 시선을 정밀한 분석적 사유와 심층적 철학적 성찰에 의거하여 펼치는 걸작으로서 계율이라는 규범적 행위규칙과 철학적 성찰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



저자소개


저자 : 원효

元曉

신라 진평왕 39년(617) 압량군 불지촌(현 경북 경산)에서 출생했다. 소년 때(16세) 출가하여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치열하게 수행하였고, 지음知音의 도반 의상義相(625-702)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다가 깨달음 성취로 인한 자신감이 생겨 유학을 그만두었으며, 서민 대중들에게는 신뢰와 희망의 대상이었고, 권력과 제도권 승려들에게는 불편하면서도 경외의 대상이었던 인물. 왕족 과부와 결혼하여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이 된 설총薛聰을 낳고는 환속하여 비승비속非僧非俗인 거사居士로서 수행하기도 하였던 인물. 특정한 삶의 유형과 진영에 소속되거나 머물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듯 내달렸던 인물. 신분이 미천한 대중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부처 되는 길을 알리려고 춤과 노래 등 다양하고도 파격적인 실험을 하였고, 심오한 체득과 혜안을 웅혼한 필력으로 종횡무진 글에 담아내어 당대 최고 수준의 불교지성을 동아시아 전역에 흩뿌렸던 인물. 인도의 불교논리학 대가인 진나陳那(Dignāga)의 문도가 당나라에 왔다가 입수하여 읽고는 감탄하여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해 인도에 보냈다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지은 인물. 그와의 밀접한 연관에서 한반도에서 찬술된 것으로 보이는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 관한 최초/최고의 주석인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하여 자신의 불교 탐구와 안목을 총정리하고 있는 인물. 만년에는 토굴같이 누추한 절(穴寺)에서 수행하다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였던 인물. -현존하는 원효 관련 기록에서 포착되는 단면들이다.
이칭異稱, 진찬眞撰 여부 등을 감안할 때, 대략 80여 부 200여 권이 확인되는 그의 저술의 양과 질은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 가히 최고 수준이다. 양으로만 보아도 한반도에서 그를 능가하는 경우가 없을 뿐 아니라, 중국의 대저술가였던 천태 지의智顗(538-597, 30여 부)나 화엄 법장法藏(643-712, 50여 부), 법상 규기窺基(632-682, 50여 부)도 원효에 비견되기 어렵다. 그의 80여 종 저서 중에서 완본으로 전하는 것이 13종, 잔본殘本이 8종이다. 잔본까지 합하여도 21종 저서가 현존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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