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의 빛과 그늘
현대 사회는 숨이 가쁘다. 옆도 뒤도 보지 않고 앞만 향한 무한질주를 하고 있다. 그중 특히 생명과학 분야가 이룩한 지난 수십 년간의 성과는 수억 년의 인류 역사를 다시 쓰기에 충분하기에 이르렀다. 생명의 ‘복제’라는 소도(蘇塗, 신의 영역)의 담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논란을 볼 때 생명과학의 윤리적 철학적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과학지식이 그 주체의 본질로 본래면목으로 접근하여 갈수록 그 지식이 지닌 빛과 그늘에 대하여 주체자 자신의 신중한 성찰을 더욱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숨 가쁜 생명과학 현장의 복판에 서서 저자 우희종 교수(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면역학 교실)는 이 책 《생명과학과 선(禪)》을 통해 불자의 시선으로 생명과학이 걸어온 길, 즉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지식체계인 생명과학은 ‘생명’에 무지(無知)
저자는 생명과학에서 다루는 ‘생명’은 본래 의미의 것이 아닌 ‘생명체’를 말한다고 지적한다.
생명과학이란 ‘생명’ 자체를 다루는 학문이 아니고 죽음이라고 불리는 ‘개체의 소멸’과 더불어 늙음이나 병이라고 불리는 그 ‘소멸 과정’을 다루는 학문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과학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과학’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본문 12쪽,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화두인 ‘생명복제’라는 것도 알고 보면 생명을 품고 있는 껍질, 즉 ‘생명체’의 복제일 뿐이다. 생명 그 자체는 “늘거나 줄거나 하지 않는 것(반야심경)”이다. 그럼에도 ‘생명체’를 다루는 생명과학자들은 정작 ‘생명’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과학자는 생명의 ‘인드라망’을 보라
생명에 대해 ‘무지’한 과학이 돌이킴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그 결과는 어떠한가.
얼마 전 야기된 국내 연구에 대한 국제 학계의 문제 제기를 보면서 단순한 개체 연구를 하는 생명과학이 너와 나 상생相生의 생명 연구가 되기 위해서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으며 나중도 좋아야 한다.”는 부처님 말씀을 떠올려 본다. 과정 자체가 곧 결과임을 아는 불자이기에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그 연구과정이 합리화 될 수 없는 것도 중요하다. [본문 196쪽, 생명과학과 윤리]
그리고 이러한 생명과학자들의 질주 뒤에는 잉여가치만을 지상선으로 둔 거대 자본의 논리가 여지없이 작용하고 있음도 지적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생명복제인가?’라는 기본적 질문을 던질 때, 이 연구가 근거하고 있는 인간의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과 더불어, 비록 난치병 환자들을 위해 진행된다고 하는 복제 연구라 하지만 이런 연구에 투자되는 연구비의 1%만 사용해도 제3세계에서 빵 한 조각이 없어 굶어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려낼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생명복제 연구란 희귀병 치료가 시급한 부자 나라의 연구이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자본 횡포의 숨겨진 모습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 238쪽, 에필로그]
병(病)은 퇴치가 아니라 ‘실체 없음’
그러나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고통을 없애주고 기쁨을 주는 과학이 잘못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퇴치한다고 하여 없어지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고통의 ‘치료’만이 능사가 아니므로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 고통의 뿌리를 잘 살펴 근원적 ‘치유’가 되도록 해야 함을 당부한다. 많은 병들이 몸의 고통의 형태로 띠고 나타나지만 잘 보면 그 뿌리는 결국 우리 마음에 닿아 있으므로.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일종의 기계 작용으로 파악해서 다루는 현대과학 만으로는 우리가 생각하듯 우리의 고통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현대의학으로 치유할 수 있는 고통은 치료해야 하지만, 유한한 우리 존재에 내재해 있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는 부처님 당시 병에 걸려 고통 속에 힘들어 하는 제자에게 보여준 부처님의 모습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으로 제자의 고통을 없애 준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의 실체 없음을 보아 편한 마음으로 고통을 받아들여 임종을 맞이하게 하였다. [본문 68쪽, 생명과학이 가는 길]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볼 때
저자는 경전과 선사들의 말씀을 예로 들며, 헛됨과 메아리를 좇는 일을 그만두라 권한다. “지식 창출과 생산성 추구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소진시키는 이 시대 속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더 이상 “과잉된 앎”을 만들어 내거나 좇으며 살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되찾아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본문 230쪽, 담담한 유희정신]
자연 앞에 서 보라. 이 화엄의 아름다움 앞에 서 보면 그곳에 《성경》 말씀이 살아 있고 부처의 팔만사천법문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모든 것은 때가 되면 갈 것이요 때가 되면 올 것이니, 가고 옴이 어디 따로 있을 것인가.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첨단 지식의 위대함과 탁월함으로 포장하지 말고 겸허히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본문 234쪽, 자연은 고독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