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홍(王弘)을 비롯한 몇몇 역학자들은 “초씨가 시(詩)로 점사(占辭)를 대신한 이후로 점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문왕 주공 공자의 글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초씨의 죄이다.”라고 성토한 것 역시 초공(焦?)의 [역림]이 매우 유용하고 후세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반증이다. 대산 김석진선생님 추천사
초연수(焦延壽)의 [초씨역림]은 역의 점서적 기능과 의미를 확장시킨 것으로 매우 가치 있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역이 64괘를 6변하여 확장한 384효에 대한 효사를 짓고 활용해 온 것이라면, [초씨역림]은 64괘를 64변해서 확장한 4096효에 대하여 효사를 지어 활용하게 했다. 기존의 역의 경우 설시법(?蓍法)이나 척전법(擲錢法) 등으로 점괘(占卦)를 얻을 때, 한 효도 동하지 않을 수도 있고 여섯 효가 모두 동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때마다 효변(爻變)을 살피고 괘변(卦變)을 살펴서 길흉을 판별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초씨역림]은 다양한 경우의 효동(爻動)을 미리 상정해서 4096개의 효사를 써 놓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효동을 모두 반영할 필요가 있다는 요구에 부응해서 집필되었기에 역림(易林)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김성기교수님 추천사
외황현을 범죄 없는 마을로 만들다 [초씨역림]의 저자인 초연수는 부귀를 탐하지 않고 민생에 힘쓰는 훌륭한 목민관으로서의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소제(昭帝:B.C.88~74) 때 외황현(外黃縣)의 현령이 되었을 때 점을 쳐서 도적의 발호를 미리 알고 막았으며, 양왕(梁王)이 1년 내내 사건과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을 높이 평가해서 승진시키려 했는데, 외황현의 원로와 관리들이 현령을 바꾸지 말아달라고 상소를 해서, 녹봉만 올려주고 계속 외황현의 현령으로 남아있도록 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사회적으로 존경받았던 목민관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빈천하게 살면서도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 양성에 힘쓰며 살았다. 제자로는 경방(京房)이라는 탁월한 상수역학가를 두기도 했다. 성균관대학교 김성기교수님 추천사
후한의 명제가 기우제를 지낼 때 비가 많이 올 것이라고 가르쳐주다 한나라 명제(明帝) 5년(AD 62년) 가을에 서울에 비가 적게 오니, 황제가 운대로 가서 자리를 마련하고 점괘를 얻었는데, [역림]의 ‘진지건(震之蹇)’에 “개미가 자신이 사는 굴의 입구를 막으니, 큰비가 올 것이다.”라 하였는데, 과연 큰 비가 내렸다고 한다. [동관한기(東觀漢記)]
주역의 괘상변화를 연구하고 경전과 고사를 활용하여 문학적으로 승화하다 [초씨역림]은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양신(楊愼)은 “초씨의 [역림]은 서경(西京)의 문사(文辭)로, 글이 모두 고운(古韻)으로 되어 있다. [모시(毛詩)]나 [초사(楚辭)]의 협운과 서로 부합된다. 어떤 글은 시 같고, 어떤 글은 악부나 동요 같다.”라고 하여 [초씨역림]을 점복(占卜)을 넘어선 문학적 가치가 있는 저작으로 평가하기도 했다.